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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에 대해 알아보기

by 써니와 함께 행복한 실버라이프 2025.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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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써니입니다. 2025년 푸른 뱀의 해인 을사년이 되었습니다. 올해는 육십 간지의 42번째해로 청색의 '을(乙)'과 뱀을 의미하는 '사(巳)'를 상징하여, '청사(靑蛇)의 해'라고도 부릅니다. 새해가 되면 지나간 해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생기기 마련인데요. 1905년 을사년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905년 을사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리고 그 이후 우리나라는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을사년의 역사적 배경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도 을사년은 몇 차례 등장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을사년은 1905년 일 것입니다. 이 해에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인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국민들의 분노와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 조선은 국내외적으로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정치적 혼란과 부패가 지속되었고, 외세의 침략이 계속되면서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04년  2월,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했습니다.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의 독립을 침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한제국 국민들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일부 국민들은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거나, 일본에 대항하는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당시 국제사회는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요청은 무시되었습니다. 

 

결국 1910년 8월 22일 한일 합병 조약이 체결되며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1945년 광복까지 35년간 일제 강점기가 이어졌습니다. 

 

을사년에 일어난 주요 사건

앞서 언급했듯 을사년은 한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해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사건들을 소개하겠습니다. 

 

- 을사조약 :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제국의 주한 공사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입니다. 이 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했고, 일본은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했습니다. 이 조약은 국제법상 효력이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해한 것은 분명합니다. 

 

- 을사의병 : 을사조약 체결에 항의하여 일어난 의병운동입니다. 이때 참여한 의병들은 대부분 농민이었고, 지도부는 전직 관료나 유생들이었습니다. 을사의병은 일본군과 맞서 싸웠지만, 무기와 훈련 면에서 일본군에 비해 열세였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사의병은 국권 회복을 위한 노력과 민족의식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 헤이그 특사 파견 : 1907년 6월, 고종황제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인해 특사들은 회의에 참여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고종 황제는 퇴위하게 되었습니다. 

 

을사년과 관련된 인불

- 이토 히로부미 : 1905년 11월 17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열린 회담에서 대한제국의 총리대신 이완용와 을사늑약을 체결한 인물입니다. 

 

- 이완용 : 을사늑약 체결 당시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으로, 일제의 침략에 적극 협력하여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한 인물이며, 한일 합병 조약 체결에도 관여하여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 민영환 :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자결한 인물로서, 그의 죽음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민족 저항 운동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 세 인물은 을사년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로, 각자의 선택과 행동은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을사년을 둘러싼 국제 관계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선은 일본, 러시아, 미국 등 열강의 세력 다툼의 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을사년은 조선의 국운이 크게 기울어진 해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 일본의 조선 침략 :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1904년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였으며,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국권을 완전히 빼앗았습니다. 

 

- 러시아의 패배 :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일본과 대립하였으나, 러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 미국의 배신 :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여 일본이 조선 침략을 지원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미국은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국제관계의 변화 속에 조선은 주권을 잃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이는 이후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을사년이 현대 역사에 미친 장기적 영향

조선의 국권 상실이라는 큰 사건이 일어난 을사년은 현대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래는 그 주요한 영향들입니다. 

 

- 민족 분단의 원인 : 일제 강점기 동안 민족 내부의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었으며, 이는 광복 이후 민족 분단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습니다. 

 

- 민주주의 발전의 저해 : 일제 강점기 동안 민주주의의 발전이 저해되었으며, 이는 광복 이후에도 지속되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어려움을 초래하였습니다. 

 

-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 일제 강점기 동안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대한민국이 경제적 불평등 문제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 문화적 정체성 위기 :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의 전통문화가 파괴되고 일본의 문화가 강요되었습니다.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대한민국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낳고 있습니다. 

 

이렇듯 을사년으로부터 이어진 영향들은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으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을사년을 소재로 한 문학과 예술

을사년은 한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며, 이에 대한 문학과 예술 작품도 많이 창작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시 : 민영 시인의 '을사년의 겨울밤'은 을사늑약 체결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작품으로, 나라를 잃은 슬픔과 분노는 담고 있습니다. 

 

- 소설 :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은 일제 강점기부터 광복까지의 시기를 다룬 대하소설로, 을사늑약 체결 이후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덕혜옹주'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소설로, 을사늑약 체결 이후 대한제국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 덕혜옹주의 비극적인 삶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 영화 : '박열'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 계획을 자백하며 사형까지 무릅쓴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을사조약으로 인해 국내상황이 어지러운 모습 또한 담고 있습니다. 

 

- 드라마 : '미스터 선샤인'은 신미양요 때 군함에 승선해 미국에 떨어진 한 소년이 미국 군인 신분으로 조국인 조선으로 돌아와 주둔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드라마입니다. 주인공인 유진 초이(이병현)의 부모님 이야기를 다루는 장면에서 을사늑약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을사년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국민들의 역사의식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을사년에 대한 현대적 재평가

최근에는 을사년에 대한 현대적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을사늑약이 불법적으로 체결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를 무효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국제법적으로도 을사늑약은 무효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늑약 체결 당시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독립국으로 인정받고 있었으며, 조약 체결을 위해서는 한국 정부의 동의가 필요했으나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위협하여 강제로 조약에 서명하게 했습니다. 

 

을사늑약이 무효화되면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간 1905년 11월 17일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닌 독립국으로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게 됩니다. 재평가 움직임은 한국의 역사와 주권을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러한 노력이 계속된다면 을사년의 역사적 상처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을사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을사늑약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 중 하나이지만,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 알고, 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예측하며 대비하는 자세를 가지면서 올 한 해를 시작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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